전체 글
-
3화. 서랍 두칸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2. 16:26
화산려(火山旅) 육이 → 화풍정(火風鼎)간판을 못 찾아서 세탁소에 물어봤다고 했다. 아래층 주인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을 거다. 늘 그런다.들어온 사람은 쉰일곱, 남자였다. 앉기 전에 방을 한 바퀴 둘러봤다. 어디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.그리고 앉으면서 바지 무릎을 두 번 털었다. 먼지 같은 건 없었다.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.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"아이고, 네.""뭐가 궁금해서 오셨어요.""집을 하나 얻을까 하는데요. 얻는 게 맞는지 아닌지를 모르겠어서요." 이야기는 이랬다.서른둘에 첫 현장에 나갔다. 그 뒤로 스물다섯 해를 밖에서 살았다. 현장 열한 군데, 관사와 원룸과 컨테이너를 옮겨 다녔다.집에는 두 달에 한 번 왔다. 금요일 밤에 올라와서 일요일 오후에 내려갔다."애 초등..
-
2화. 한 번도 안 싸웠는데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1. 12:15
2화. 한 번도 안 싸웠는데요풍천소축(風天小畜) 구삼여섯 시 반에 왔다. 창이 서향이라 그 시간에 오는 사람은 얼굴 반쪽이 역광이 된다. 블라인드를 내려본 적이 있는데 그러면 방이 너무 어두워져서 그냥 둔다.스물아홉이라고 했다. 앉으면서 휴대폰을 탁자 위에 엎어 놨다. 손가락 두 개에 하얀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. 이야기하는 내내 그걸 뜯었다 다시 붙였다 했다.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.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"네, 괜찮아요.""말을 할까 말까 해서 왔어요." 이야기는 이랬다.삼 년 전에 클라이밍장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. 화요일하고 목요일, 주 두 번. 처음 일 년은 그냥 같은 시간에 오는 사람이었고, 그다음부터는 끝나고 같이 밥을 먹었다.이사를 두 번 도왔다고 했다. 한 번은 트럭 뒤에 타고 갔..
-
1화. 증거는 백 장인데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1. 11:41
1화. 증거는 백 장인데택수곤(澤水困) 구사간판이 없어서 두 번 지나쳤다고 했다. 그럴 만하다. 1층이 세탁소고 내 방은 그 위층인데, 계단에 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.들어온 사람은 마흔한 살, 개발자였다. 앉자마자 무릎에 서류 봉투를 올려놨다. A4로 백 장은 돼 보였다. 모서리가 하얗게 닳아 있었다. 오는 길에 접었다 폈다 했겠거니 싶었다.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.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"아, 네. 괜찮습니다.""정리를 좀 해 왔어요." 그가 봉투를 툭툭 쳤다.이야기는 이랬다.회사에서 2년째 붙잡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. 결제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엎는 일이었다. 그는 처음부터 일정이 말이 안 된다고 했다. 위에서는 6개월을 잡았는데 그가 보기엔 최소 1년이었다."메일로 세 번 썼습니다..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