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5화. 스물두 가지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4. 11:42
5화. 스물두 가지산풍고(山風蠱) 구이 → 중산간(重山艮) 네 시 십 분에 그가 왔다. 앉기도 전에 다섯 시 반에는 나가야 한다고 했다. 스물일곱, 남자였다. 의자를 당기면서 손목시계를 봤고, 그 뒤로도 몇 번 더 봤다. 손끝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. 오른손에 둘, 왼손에 하나.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. 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"네.""뭐가 궁금해서 오셨어요.""가게를 접어야 할까요, 계속해야 할까요." 이야기는 흘러나왔다. 어머니가 반찬가게를 스물세 해 했다. 시장 안쪽, 세 평쯤 되는 자리다. 작년 4월에 쓰러졌다. 지금은 재활병원에 있고, 말은 하는데 오른쪽이 아직 불편하다.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가게를 맡았다. 1년 5개월째였다. "엄마가 하던 게 스물두 가지예요. 콩자반, 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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4화. 이상 없음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3. 19:49
산수몽(山水蒙) 육사 → 화수미제(火水未濟) 앉자마자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. 내가 보온병을 들기도 전이었다. 서른여섯, 여자였다. 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 "아, 저는 이거 있어서요." 그래도 한 잔 따라 줬다. 그는 손도 안 댔다. "뭐가 궁금해서 오셨어요." "병원을 계속 다녀야 할까요, 그만둬야 할까요." "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닌데요." "······." "그건 의사한테 물으셔야죠." "의사한테 물어봤어요. 아홉 번이나…" 이야기는 이랬다. 3년 전 10월부터 명치 아래가 아프다. 하루 종일은 아니고 오후 서너 시쯤부터 시작해서 잘 때까지 간다. 처음엔 체한 줄 알았다고 했다. 동네 내과 네 곳, 한의원 두 곳, 대학병원 두 곳, 정신건강의학과도 한 번 갔다. 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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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화. 서랍 두칸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2. 16:26
화산려(火山旅) 육이 → 화풍정(火風鼎)간판을 못 찾아서 세탁소에 물어봤다고 했다. 아래층 주인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을 거다. 늘 그런다.들어온 사람은 쉰일곱, 남자였다. 앉기 전에 방을 한 바퀴 둘러봤다. 어디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.그리고 앉으면서 바지 무릎을 두 번 털었다. 먼지 같은 건 없었다.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.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"아이고, 네.""뭐가 궁금해서 오셨어요.""집을 하나 얻을까 하는데요. 얻는 게 맞는지 아닌지를 모르겠어서요." 이야기는 이랬다.서른둘에 첫 현장에 나갔다. 그 뒤로 스물다섯 해를 밖에서 살았다. 현장 열한 군데, 관사와 원룸과 컨테이너를 옮겨 다녔다.집에는 두 달에 한 번 왔다. 금요일 밤에 올라와서 일요일 오후에 내려갔다."애 초등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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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화. 한 번도 안 싸웠는데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1. 12:15
2화. 한 번도 안 싸웠는데요풍천소축(風天小畜) 구삼여섯 시 반에 왔다. 창이 서향이라 그 시간에 오는 사람은 얼굴 반쪽이 역광이 된다. 블라인드를 내려본 적이 있는데 그러면 방이 너무 어두워져서 그냥 둔다.스물아홉이라고 했다. 앉으면서 휴대폰을 탁자 위에 엎어 놨다. 손가락 두 개에 하얀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. 이야기하는 내내 그걸 뜯었다 다시 붙였다 했다.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.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"네, 괜찮아요.""말을 할까 말까 해서 왔어요." 이야기는 이랬다.삼 년 전에 클라이밍장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. 화요일하고 목요일, 주 두 번. 처음 일 년은 그냥 같은 시간에 오는 사람이었고, 그다음부터는 끝나고 같이 밥을 먹었다.이사를 두 번 도왔다고 했다. 한 번은 트럭 뒤에 타고 갔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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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화. 증거는 백 장인데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9. 11. 11:41
1화. 증거는 백 장인데택수곤(澤水困) 구사간판이 없어서 두 번 지나쳤다고 했다. 그럴 만하다. 1층이 세탁소고 내 방은 그 위층인데, 계단에 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.들어온 사람은 마흔한 살, 개발자였다. 앉자마자 무릎에 서류 봉투를 올려놨다. A4로 백 장은 돼 보였다. 모서리가 하얗게 닳아 있었다. 오는 길에 접었다 폈다 했겠거니 싶었다.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."차는 없어요. 그냥 물입니다.""아, 네. 괜찮습니다.""정리를 좀 해 왔어요." 그가 봉투를 툭툭 쳤다.이야기는 이랬다.회사에서 2년째 붙잡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. 결제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엎는 일이었다. 그는 처음부터 일정이 말이 안 된다고 했다. 위에서는 6개월을 잡았는데 그가 보기엔 최소 1년이었다."메일로 세 번 썼습니다..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