전체 글
-
26화. 임시보관함에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6. 11:46
1층에 셔츠를 찾으러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."5분이요." 그가 먼저 말했다. "안에 안 계셔서요."마흔둘, 개발자다. 1년 4개월 전에 한 번 앉았던 사람인데 오늘도 같은 봉투를 무릎에 올려놓고 내려놓지 않았다. 모서리가 그때보다 더 닳아 있었다."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습니까.""조용히 덮였어요. 아무도 사과 안 했고 저는 남았고요."다음 프로젝트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었다. 그 말을 하고 바로 고쳤다."빠진 건 아니고요. 제가 안 들어간 거예요. 그때 좀 쉬고 싶었고."조 팀장 얘기가 나왔다. 그때 위에 있던 사람인데 작년에 다른 본부로 갔다가 올해 3월에 돌아왔고, 돌아와서 그에게 한 말은 없었다.9월에 새 프로젝트가 떴다. 정산 모듈을 다시 짜는 일인데 위에서 내려온 기간..
-
25화. 아니라고 해 줄 줄 알았어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6. 11:46
우편함에 봉투가 하나 있었다. 보낸 사람 이름이 없었고,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네 번 접혀 들어 있었다.두 달 전에 어떤 분이 들고 나간 내 종이였다. 그때는 접지 않고 편 채로 가져갔다. 앞면은 그대로였고, 뒷면에 내가 적어 준 네 줄도 그대로였다.가지러 온다고 했는데 종이만 왔다. 문이 열렸을 때 나는 그걸 들고 있었다."그거 저 때문에 꺼내신 거 아니죠?"스물여섯이고, 동물병원에서 2년째 일한다고 했다. 가방을 무릎에 올려 안은 채로 앉았다."아침에 온 겁니다.""그분 잘되셨나 봐요. 그러니까 돌려주셨겠죠. 아니면 뭐 짐 정리하다 나왔는데 버리기는 좀 그래서 보내셨을 수도 있고요. 아, 죄송해요. 제가 남의 일에 이래요.""거기까지는 안 왔습니다. 종이만 왔어요."그가 물을 사양했다. 내 잔에 따르..
-
24화. 제가 적었어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6. 11:44
계단에서 목소리가 먼저 올라왔다. "그러니까 그걸 왜 저희한테 물으시냐고요. 그 조항은 그쪽에서 넣으신 거잖아요." 문이 열렸다. 그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들어와서 나한테 손바닥을 한 번 들어 보였다. 잠깐만요, 라는 뜻이었다. 앉아서 3분을 더 했다. 대관료 이야기였는데, 그 3분 동안 자기 얘기는 한 번도 안 나왔다. "죄송해요. 저희 애가 계약서를 잘못 읽어서." 애가 아니라 단원이라고 했다. 서른여섯이고, 극단을 11년째 하고 있다. "저 목소리 좀 커요. 그건 그냥 제 톤이에요." 그가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창틀을 가리켰다. "저거 돌려 주셔야 되는데. 한쪽으로만 가잖아요." 그러고는 일어나서 화분을 반 바퀴 돌려놓고 다시 앉았다. 줄기 하나가 창 쪽으로만 길게 나가 있던 것이 맞다. 그..
-
23화. 남은 걸로 먹어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5. 23:09
문이 열리기 전에 손잡이 소리가 두 번 났다. 잡았다가 놓은 소리였다."죄송합니다. 냄새 날 텐데요."들어오면서 한 첫마디가 그것이었다. 기름 냄새가 같이 들어왔다. 작업복 위에 점퍼를 걸쳤고 앞치마는 손에 들고 있었다.앉으면서 그는 탁자 위를 자기 앞에서부터 치웠다. 컵받침과 필통을 옆으로 밀어 손바닥 두 개만 한 자리를 비우고 거기에 지갑을 놓았다. 앞치마는 접어서 무릎에 올렸다.쉰여섯이고, 공장 구내식당 조리실에서 22년째 일한다고 했다. 하루에 사백팔십 인분을 만든다.물을 따라 줬더니 한 모금만 마시고 컵을 도로 놓았다."죄송한데요, 이런 것도 여기서 물어보는 건가요.""됩니다.""일을 그만둘까 해서요."재작년 4월에 위의 3분의 1을 잘라냈다. 그 얘기를 하면서 그는 두 번 웃었다."큰 수술도 ..
-
22화. 아무도 안 달라는데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5. 09:42
그는 앉으면서 휴대폰을 탁자에 올려놓고 각을 맞췄다. 탁자 모서리와 나란해질 때까지 두 번 고쳤다."제가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."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놨다. 캡처 한 장이었고 줄이 여섯 개였다. 적금 해지 내역이었다."2년 전 3월, 그해 9월, 작년 1월, 작년 6월, 작년 11월, 올해 3월이요. 여섯 번이요.""금액도 적혀 있네요.""다 오십만 원씩 넣던 거예요. 넣은 기간이 달라서 금액이 달라요.""제일 오래 넣은 게 어느 겁니까.""작년 6월 거요. 5개월 11일이요."스물여섯이고 사무직 3년차라고 했다. 컵은 손대지 않고 가방에서 자기 텀블러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."올해 3월에 깬 돈이 아직 통장에 있어요. 사백삼십만 원이요. 3개월째 그대로요.""6월에 다시 안 드셨네요.""네. 그래서 여..
-
21화. 그럼 제 소리는요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4. 11:39
노크 소리가 세 번 났다. 컸다.문을 여니까 그가 서 있었다. 두 달 만이었다."이번엔 들리셨죠.""들렸습니다.""세게 했어요. 저번에 못 들으셨다고 해서요."앉으면서 악보를 두 권 꺼냈다. 포개지 않고 한 뼘쯤 띄워서 나란히 놨다. 양손을 한 권씩 위에 올렸다."12월 6일까지 9주 남았어요. 화요일이 아홉 번이요.""연습은 그대로 화요일입니까.""7시 30분에서 7시로 당겼어요. 공연 앞두고요. 문화회관 3층인데 7시에는 아직 앞 팀이 있어서 복도에서 기다려요.""대형표는요.""그대로예요. 1열 오른쪽 끝이요.""누가 그 자리로 넣었는지는 물어보셨습니까."그가 악보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폈다."안 물어봤어요."그가 오른쪽 악보를 반 뼘 밀었다. 표지에 이름이 없었다."박 선생이 그만뒀어요. 8월 ..
-
20화. 일곱 자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3. 09:17
그가 들어와 앉더니 종이 한 장을 탁자에 놓고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폈다. 그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. 의자는 탁자에서 한 뼘쯤 떨어져 있었다. 당기지 않았다. 컵을 밀어 놨더니 고개를 저었다. "저는 괜찮습니다." 그대로 이 분쯤 갔다. 아래층에서 세탁기가 돌고 있었다. "뭘 물으러 오셨습니까." "목요일에 회의가 있는데요. 거기서 말을 할까요, 아니면 그만둘까요." 서른일곱이라고 했다. 식품회사에서 품질관리를 9 년 했다. 셔츠 가슴 주머니에 볼펜이 두 개 꽂혀 있었다. 하나는 검정이고 하나는 빨강이었다. "이월에도 회의가 있었습니다. 원료 거래처를 바꾸는 안건이었고요." "반대하셨고요." "네." "어떻게 하셨습니까." "자료를 열여섯 장 만들어서 갔어요. 칠 분 말했습니다." "그러고요." ..
-
19화. 저녁에 뭐픽션이논픽션(주역) 2026. 10. 1. 10:30
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먼저 인사를 했다. "안녕하세요. 4시에 예약한 사람이요." 그가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의자를 조금 돌려 앉았다. 창을 등지지 않는 쪽이었다. "저거 유리 바로 옆이라 저녁에 식어요." 창틀 화분을 한 뼘쯤 안으로 들여놓고 다시 앉았다. 전에 마른 잎을 떼어낸 자리 옆으로 촉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. "쉰일곱이고요. 예식장에 있어요. 진행 쪽이요. 19년 됐어요." "진행이요." "식 시작부터 끝까지 돌리는 거예요. 토요일엔 열한 건 해요. 20분 간격이고요." 그가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탁자에 놨다. 분 단위로 칸이 나뉘어 있었다. "양가 어머님들 붙으셔도 제가 5분이면 정리해요. 그건 자신 있어요." 말하는 동안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. 내가 입을 떼면 끝나기 전에..